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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이 말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사령관이어야 할 사람이 장기간 불법을 저질렀다는 사실과 증거, 정황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 누군가는 그런 대통령을 비판했고, 사회에 관심이 많은 어떤 가수들은 곡으로 직접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이승환, 이효리, 전인권이 힘을 합친 “길가에 버려지다”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나라가 어려울 때 가수가 노래로 목소리를 내는 건 소위 ‘빨간 딱지’가 붙던 과거부터 현재까지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리고박근혜 대통령 스캔들이 심화하자 음악 팬들은 자연스럽게 힙합 가수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과거 사회 비판, 저항 의식으로 똘똘 뭉쳤던 힙합이, 온갖 자랑을 늘어놓으며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던 힙합이 왜 이번 문제에는 가만히 있느냐는 것이었다.



사회 비판과 저항 정신. 힙합이라는 이름이 텔레비전에 나올 때마다 두 단어는 항상 함께 등장했다. 그때마다 '기존의 가치에 반기를 들고, 사회 부조리에 비판의 메스를 들이대고, 현시대 청춘의 아픔을 대변한다.’ 따위의 문장이 힙합의 옆에 함께했다. 미디어의 소개가 끝나면 두건을 뒤집어쓰거나 커다란 힙합 바지를 입고 강렬한 눈빛으로 무장한 ‘힙합 전사’들이 등장했다. 청춘을 대표하는 삐딱한 사람들. 힙합은 딱 그 정도 선에서 대중들에게 소개됐다. 그 프레임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쇼미더머니> 같은 프로그램에 힘입어 한국도 미국처럼 힙합이 대중음악의 흐름을 이끌게 되고, 적잖은 래퍼들이 광고 모델로 발탁되는 등 대외적 변화는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힙합을 바라보는 미디어와 기성세대의 시선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여전히 그들은 힙합을 사회에 대해 부정적이며 젊은이의 객기 가득한 음악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사회 비판은 힙합의 필수 요소일까


하지만 사회 비판은 힙합과 동일 선상에 놓이는 요소가 아니다. 힙합과 그 속의 사회 비판적 요소가 함께 탄생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초창기 힙합은 파티 음악의 성향이 짙었다. 파티의 호스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분위기를 띄우고 이어가는 것이었다. 타고난 재능으로 랩을 하며 흥을 돋우는 이는 많았지만, 그 속에 사회적인 가치를 자연스럽게 담아낼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았다. 넷플릭스의 드라마 <겟 다운>은 이 흐름을 어렵지 않게 짚을 수 있는 작품이다. 유독 글과 시를 잘 쓸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있는 주인공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끝내 대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그 재능을 거리의 힙합에 쏟아붓게 된다는 줄거리는 당시 현실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문학적 가치를 지닌 가사와 힙합의 조화는 힙합의 탄생 이후의 흐름이다. 그래서 사회를 비판하는 힙합, 소위 말하는 컨셔스 랩(Conscious Rap)은 힙합의 하위에 놓인 개념이지 힙합 그 자체의 핵심은 될 수 없다. 이는 과거에도 그렇고, 현재에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말하는 컨셔스 랩에 대한 정의도 사회 비판이라는 카테고리 하나에 쑤셔 넣기에는 모호한 구석이 많다. 컨셔스 랩을 우리 말로 옮기면 ‘의식 있는 랩’ 정도가 된다. 여기서 의식을 지닌다는 건, 정치적인 문제에 의식을 지닌다는 게 아니라 그들의 주변을 둘러싼 모든 일상적, 사회적인 모든 문제를 의식하고 지켜본다는 의미에 가깝다. 그래서 래퍼들이 일상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나아갈 방향을 논의해도, 어려웠던 어린 시절과 고향에 대한 사랑을 은유적으로 표현해도, 총과 살인에 대한 걱정을 드러내도 컨셔스 랩이 될 수 있다. 정치적인 문제를 소재로 한 랩은 그 과정에서 탄생한 또 하나의 갈래에 가깝다. 그 자체로 목적인 게 아니라, 일상의 문제를 더듬다 보면 나타나는 근원의 문제가 곧 정치였을 뿐이다. 그래서 결코 쉬운 주제가 아니다. 미국의 음악가들 가운데서도 아주 소수만이 이 소재를 음악적으로 훌륭하게 풀어내는 것도 같은 이유다.


문제는 왜곡된 미디어의 책임?


그러한 역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미디어가 힙합을 바라보는 시선은 분명 낡았다. 핵심을 짚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래서 현재 뒤틀려 있는 힙합의 이미지는 미디어가 빚은 문제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미디어만 비난하기는 어렵다. 미디어는 그 대상이 무엇이든 의도를 투영해 카메라 렌즈에 담는다. 그 초점은 대개 가장 자극적인 부분에 맞춰져 있다. 힙합 역시 그 대상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힙합의 폭력성은 자극적인 이미지를 만들기 좋은 소재였을 뿐이다. 기성 미디어는 소통이라는 가면을 쓰고 정보를 일방적으로 주입하며, 이는 그들의 공공연한 특성에 가깝다. 그들이 견지하는 프레임이 싫다면, 그 프레임을 넘어설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힙합은 이 부분에서 부지런하지 못했고, 때로는 서툴렀다. 시류를 타고 유행의 최전선에 올라가 수많은 대중의 지지를 받았지만, 미디어가 짜 놓은 프레임 이상을 보여주는 데에는 지지부진했다. 여전히 멋을 자랑하기 위해 약자를 짓밟았고, 자신의 정체성이라며 주변에 대한 혐오, 차별을 자랑하듯 드러냈다. 이에 대해 일부 리스너는 ‘개인의 치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드러낼 줄 아는 음악’이라며 동조하고 격려하듯 박수를 보냈다. 물론 개인의 약점을 드러낸다는 건 다른 방법으로 컴플렉스를 치료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기에 과감하고 용감한 시도가 될 수 있다. 개인적 성향이 타인에게 배타적이지 않으며, 근거 역시 뚜렷하다면 누구나 이를 존중해줄 필요도 있다. 하지만 그 성향, 표현이 단순한 음악과 가사를 넘어 타인에 대한 공격으로 변하고 인격적 모독을 준다면 반드시 재고해야 한다.



특히 유명세를 얻은 힙합 가수들 가운데 일부는 이 부분에서 성숙하지 못했다. 때로는 무감각하기도 했다. 그들은 차례로 비슷한 방식의 차별을 엇비슷하게 드러냈다. 사회 비판이 힙합의 유일한 키워드가 아님을 강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약자에게 폭력적인 부분들, 타인을 존중하지 못한 부분들에 대해 돌아보는 것은 회피했다. 생각해보자. <쇼미더머니> 방영 이후 지속해서 불거졌던 논란을. 누군가는 동료 뮤지션을 보고 자위를 했었다며 다분히 성희롱적인 이야기를 남발했고, 이성에 대한 편견 가득한 시선을 여과 없이 분출했다. 다른 누군가는 <프로듀스 101>에 출연한 가수 연습생들을 ‘101마리 달마시안’에 비유하며 성희롱하는 듯한 뉘앙스의 가사를 뱉었다. 이들 모두 ‘의도가 아니었다.’ 또는 ‘예술적인 표현이었으니 양해 바란다.’ 같은 말로 세간의 비판을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유명 기획사 소속 아이돌 그룹 래퍼의 임산부 희롱 가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대통령 스캔들이 터져 나오고, 시국 선언과 유명 뮤지션의 비판 곡이 발표된 이후의 여론은 대략 이렇다. ‘사회적 약자를 놀리거나 희롱하기는 잘하면서, 정작 중요한 사회적 문제에는 입을 다문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것이 힙합이냐’ 이러한 비판이 다시금 떠오른 것은, 단순히 미디어가 만들어낸 프레임에서만 비롯된 일이라고 보기 어렵다. 어쩌면 비판과 피드백을 진지하게 대하지 못한 이들이 자초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힙합, 조금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모든 힙합이 차별과 자극적 언행으로 점철된 것은 아니다. 그런 부분은 일부 래퍼와 몇몇 곡의 가사에서만 찾을 수 있다. 얼마 전부터는 MC 메타(MC Meta), 제리케이(Jerry.K) 등 적지 않은 래퍼들이 현 시국에 대한 비판을 랩으로 멋지게 풀어내기도 했다. 중심을 잃지 않은 주제, 시적인 표현, 훌륭한 랩 퍼포먼스의 삼박자가 잘 어우러진 곡들이었다. 또한, 12월 3일 오후 10시 광화문 광장에서는 'Fight The Power'라는 타이틀의 힙합 공연이 열린다. 불한당과 VMC, ADV, 루드페이퍼(Rude Paper) 등이 나선다. 그러나 이러한 힙합의 멋진 행보는 충분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일부 래퍼들이 내뱉었던 문제적 가사가 힙합과 미디어가 만나는 경계의 최전선에서 모든 시선를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를 위주로 힙합에 대한 인식은 많이 개선되고 있다. 힙합을 하나의 음악 장르가 아니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즐기려는 이들도 늘고 있다. 하지만 갈 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일차적 문제는 분명 사회 비판과 힙합의 정신을 멋대로 해석해 있지도 않은 힙합 전사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 미디어에 있다. 그들이 말하는 ‘힙합 정신’은 ‘힙합 전사'라는 단어 못지않게 편향적이고 몰가치하다. 문제는 현재의 미디어들이 낡은 정의와 접근법을 고치지 않아도 힙합을 비추는 데 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이다. 다양한 원인이 존재하겠지만, 낡은 프레임을 먹여 살리는 원동력 가운데 힙합적 허용, 예술적 표현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진 약자에 대한 지나친 공격과 차별, 자극적인 가사가 존재한다는 점을 부정하긴 어렵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힙합은 다시금 과거의 이미지로 회귀하고 있다. 이 흐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힙합은 변해야 한다. 차별적 언어가 없어도, 자극적이지 않아도 힙합은 충분히 멋있게 빛날 수 있는 장르다. 아무래도 힙합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새로이 풀어야 할 과제가 주어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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