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이사야서 53장 4절


주의! 이 글은 영화 ‘곡성’의 줄거리가 포함되어있고, ‘곡성’의 줄거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이해하기 쉽게 작성되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는 분께서는 조금 나중에 이 글을 읽으셔도 좋습니다. 


얼마 전 영화 곡성을 보았다. 뭐 어쩌다 보니 혼자 보게 되었는데 영화가 제법 무서운지라 떼제공동체의 노래인 Laudate omnes gentes를 속으로 계속해서 부르며 보았다. 영화 내내 내가 미끼를 문 것인지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기 때문에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올 때까지 스크린을 황망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분도 무서울때마다 들어보자


아무래도 전공이 신학인지라 곡성에 나오는 기독교적 코드를 푸는 영화리뷰를 기대할 수 있겠지만 사실 곡성에 나오는 기독교적 코드는 신학적 주제라기보단 종교, 민속학의 주제와 닿아있다고 보기에 –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영화를 본 리뷰는 꽤 많기에 내가 굳이 작성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다. - 이 글은 영화 속 기독교 코드에 관한 글이라고 보기엔 힘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아닌 것은 아닌... 아무튼, 그런 글이 될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사는 영화의 후반부에 나오는 무명(천우희 扮)의 대사였다. 딸을 찾아 해매는 종구(곽도원 扮)의 앞에 무명이 나타나자 종구는 왜 하필 내 딸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물어본다. 여기에 무명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네 딸의 아비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여.” 눈앞에 종구를 두고 ‘네 딸의 아비’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미루어보아 그 죄는 종구만의 죄가 아님을 나타낸다. 아비의 죄과로 딸이 괴로워한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지난 5월 28일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지하철 안전문 유지보수 작업을 하는 노동자였다. 사실 이 뉴스를 처음 보고 ‘예전에 일어난 일이 왜 갑자기 다시 화제가 되었지?’ 하고 생각했다. 분명 너무나도 똑같은 사고소식을 전에도 접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스크린도어 점검 및 설치 외주업체 작업 중 사망한 희생자들을 찾아보았다. 2016년 5월 28일 서울지하철 2호선 구의역, 서울메트로 외주 스크린도어 정비업체직원 김 모(19)씨. 2015년 8월 29일 2호선 강남역, 외주 정비업체 직원 조 모(28)씨. 2013년 1월 29일 2호선 성수역, 외주 정비업체 직원 심 모(38)씨... 


‘한 번은 우연, 두 번은 우연의 일치, 세 번은 공작’이라는 김영하 소설의 대사처럼 같은 유형의 사고가 세 번이나 반복해서 일어났다는 것은 이 사고가 단순히 우연적히 일어난 사고가 아님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사실 이 사고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고였다. 2015년 한 해에만 12,134건의 안전문 사고가 발생했다고 한다. 하루 평균 33회 정도 되는 사고가 일어나는 것이다. 안전문의 유지 및 보수를 맡은 ‘은성PSD’와 ‘유진메트로컴’의 직원은 관리자를 포함해도 200명이 되지 않는다.[각주:1] 


그나마도 ‘유진메트로컴’은 주 사업분야를 안전문 설치, 유지 및 보수에서 안전문 광고대행으로 전환하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이러다 보니 실제 안전문 유지 및 보수인력은 더 적을 수밖에 없다. 사고 발생 당시 김 모씨가 포함된 근무조 6명의 노동자는 49개 역의 안전문 장애 처리를 맡고 있었다. 직원 2명이 사무실에서 대기하고, 나머지 직원 4명이 지하철역 현장으로 지령을 받고 출동하는 식이다.[각주:2] 


일은 많고 인력은 부족하니 매뉴얼이 정상가동될 수가 없다. 그렇게 떠밀린 노동자는 죽음을 맞이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죽임당했다. 그 죽임당한 노동자는 어떤 죄를 지었는가? 나는 그가 어떠한 죄를 지었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에게서 어떠한 죄를 찾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 노동자들의 죽음은 이들이 안전수칙을, 매뉴얼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안전수칙을, 매뉴얼을 지키지 않은 노동자가 있기 전에 안전수칙을, 매뉴얼을 지킬 수 없는 사회가 있다. 희생자들은 일광(황정민 扮)의 대사처럼 ‘버러지같이 미끼를 문’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의 죽음은, 그들의 다침은 우리의 아비들이 만든 세상에 죄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회의 죄는 힘이 약한자들의 희생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우리가 할 말은 희생자들이 잘못하지 않았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마치 빌라도가 예수를 보고 혐의를 찾지 못했다고 말했음에도[각주:3] 2000여 년 동안이나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로 불리게 된 것처럼 우리는 피해갈 수 없는 체제적 폭력의 동조자로 살고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체제적 폭력을 - 결국 누군가 그 폭력의 피해자가 된다는 점에서 - 사회적 원죄로 부르고자 한다.


한편 죄가 이렇게 촘촘한데 우리는 어디서 구원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종구의 힘빠진 마지막 대사에서 그 실마리를 찾는다. 


"괜찮애. 우리 효진이. 이거 다 꿈이야. 아빠가 해결할게."

  1. 황철우, “[시론] 지하철 1~4호선만 죽어나가는 이유,” 『한겨레』(2016.05.30). [본문으로]
  2. 이재욱, 방준호 , “나홀로 작업에 날아간 '19살의 꿈',” 『한겨레』(2016.05.29). [본문으로]
  3. 막 15:14 [본문으로]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