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7770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날 밤의 기억이 떠오른다. 버스는 집으로 귀가하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각자의 하루를 성실히 보내느라 지친 모습이었다. 뒷자리의 여성 두 명, 친구로 보이는 둘 만을 제외하고 버스는 조용했다. 두 여성은 백만 년 만에 만난 친구라도 되는 듯 소소하고 사사로운 이야기들을 신나서 떠들고 있었다. 

열정 같기도 하고 활발함 같기도 한 그 에너지 넘치는 목소리는 버스를 공명시키고 있을 정도의 데시벨로 버스가 출발하기 전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이상한 열정에 평소 무력한 기분으로는 그 누구에라도 지지 않는 나조차도 약간 들뜨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나와 같지는 않을 것이었다. 젊은 그들이 열정 넘치는 대화를 하는 건 그다지 특이사항이 아니지만, 그날따라 특히 성실해버려서 피곤한 하루를 보낸 탓인지 어느 양복 입은 신사는 엉거주춤 일어나 고개를 내밀어 그들에게 이렇게 주의를 시켰다


"거 조용히 좀 합시다! 씨발년들이."

순간적으로 버스가 조용해졌다. '정의로운' 양복신사 덕분에 불편할 정도의 이례적인 침묵 속에서 승객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시끄러운 여론

조영남의 대작 사건으로 인해서 여론이 아주 시끄러운 것으로 안다. 나도 아침에 일어나 그 기사를 보자마자 신나서 페이스북에 공유했으니, 평소 넷상에서 변태 할아범으로 유명한 조영남을 싫어하는 여론이라면 더 신나서 떠들었을 테다.

미리 말하지만 나는 조영남이 사기를 치든 치지 않았든 그것이 관행이든 관행이 아니든 그런 사소한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에 대해 옳다 그르다 논하기 어려운 것도 안다. 다만 나는 그의 태도가 예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발붙이고 있는 대지인, 예술에 대한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노력이나 열정에서만큼은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있었는데 오늘로써 그것마저 없다는 것을 알고 마음 놓고 싫어할 수 있게 되어 신나게 된 것이다.
 

조영남은 이전부터 자신의 작품에 대한 과도한 애착과 자랑을 일삼아왔다. 어쩌면 그리는 시간보다도 그 그림에 대해서 논하는 시간이 더 길 것만 같은 조영남의 모습을 보면서 그래도 노년에 취미 하나 생긴 동네 할아버지를 보는 것처럼 따뜻한 시선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조영남의 작품은 많은 곳에 전시되었고, 개인 전시회만 해도 40회가 넘으며, 수많은 방송을 탔다. 그의 작품 거래가는 연예인 작가 중에 가장 높은 평균 천만 원을 호가하고, 중견 작가 정도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매번 완판이 된다는 그의 작품은 특유의 팝아트적인 분위기와 시도를 통해서, 그리고 따로 미술을 배워본 적이 전무하고 학창시절 미술부장을 맡은 것이 전부라는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끈질김과 성실함, 열정을 통해서 가치가 더해졌다. 물론 유명세도 한몫했겠지만, 어느 작가 한 명이 개인전을 낼 정도로 많은 작품을 그려냈다면 그 작품의 의의를 떠나서 그 열정에서는 그 누구도 이견을 달 수는 없는 것이다.


신정아가 복귀의 발판으로 삼은 작가 조영남


어떤 작품을 평가하는 방식에 대하여

마크 로스코가 국내에 상륙했을 때, 이름부터가 아주 상징적인 '스티브 잡스가 사랑한 화가 마크 로스코' 전시회가 국내에서 열렸을 때, 동시에 마크 로스코의 이야기가 뮤지컬 '레드'로 상연되고 있었을 때, 그 소문난 잔치에 빠질 수 없다는 듯이 연합뉴스에서 방영하는 마크 로스코 전시회에 대한 정보성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그 뉴스에서 한 화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마크 로스코는 형태가 없는 그림들, 이런 그림들이 1천억, 2천억 원에 팔렸으니까. 이게 어떻게 그렇게 되느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최초의 그림이지"

그의 말하는 방식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화가라는 사람이 어느 한 화가의 작품에 대해 논하는 데 있어서 가격을 먼저 이야기한다는 것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자신의 작품이 가격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화가가 아니라면 몰라도. 

이어서 마크 로스코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는 그의 설명은 그가 느낀 놀람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고 그렇게 장면은 아나운서 출신의 도슨트가 설명하는 컷으로 지나갔다. 그 놀람은 가격에 대한 놀람이었을까? 나는 그 인물이 느낀 게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마침 때에 맞춰 방영한 마크 로스코 다큐 5부작, '추상표현주의의 거장 마크 로스코'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작업실에 앉아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깨작깨작 그리는 폼이 아무래도 피디가 시킨 연출인가 보다. 그리고 그는 그 작품에 담긴 철학을 설명한다. '웃는 보살과 십자가'. 기독교와 불교의 화개장터란다. 마크 로스코에 대한 다큐가 맞는지, 이거 광고 아닌지 제목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마침맞게 마크 로스코에 대해서 그는 설명한다.

"이것도 마크 로스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어요", "전면적으로 한 톤으로 장식한 거죠. 마크 로스코가 이런 식이거든요."

그리고 그가 보여준 것은 화투장으로 가득한 그림이었다. 마크 로스코의 작품과의 연관은 톤의 통일성이라고 한다. 다소 희미한 연관관계이기는 하지만(비슷한 톤만으로 캔버스를 구성하는 것은 한 작가의 시그너처라고 할 만큼 독창적인 것은 아니므로) 그렇다니 그렇게 믿고 싶다. 이어서 그가 말한다.


"끌릴 수밖에 없었지, 굉장히 독특하니까. '아, 어떻게 이렇게 쉽게 그릴 수가 있는가?' 우선은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한가지 색만 칠해놓고 이게 그림이다, 이게 돼요? 이런 걸 누렇게 칠해놓고 끝! 이게 되느냐고요 굉장한 용기와 철학이 필요해요. 미학, 미감, 철학. 공부를 많이 해야 돼요."

도대체 어떤 화가가 이렇게 말을 하는가? 이해가 되지 않을 여러분들을 위해서 이쯤에서 그의 이름을 공개해야겠다. 그의 이름은 조영남이었다. 이제, 이해가 될 것도 같은가?



마크 로스코가 어떤 철학으로 그런 그림을 그린 건지, 혹은 어떤 철학을 느끼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일말의 설명도 없이, 한 톤으로 장식한 게 마크 로스코의 전부라는 듯이 이야기하는 그. 용기와 철학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있다고만 설명하는 그. 그에게서 나는 보았다. 그건 노란 싹수였다. 비즈니스의 싹수. 사이비 예술가의 싹수를 말이다.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 예술이라는 농담

자연스레 뱅크시의 다큐멘터리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가 떠오른다. 이 다큐는 현대예술의 특성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구제 옷을 판매하던 한 장사꾼 티에리가 그 주인공이다. 이 장사꾼은 다큐의 시작부분에서 자신의 사업수완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주로 50달러에 사들여서 봉제선 같은 것이 조금 다른 게 있으면 디자이너 작품이라고 하고 가격을 400달러에 팔았어요. 결국 50달러로 구매한 옷으로 어떨 때는 5000달러를 벌기도 했어요'

장사꾼 티에리

그의 취미는 카메라로 영상을 찍는 것이었고, 어느 우연한 기회에 뱅크시를 비롯한 젊은 거리예술가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들을 영상으로 찍게 된다. 뱅크시는 거리예술의 목격자로서 그를 지목하고, 그에게 다큐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하지만 결국 그가 만들어낸 영상은 순서도 서사도 설명도 없는 파편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뱅크시는 허탈해하고 그에게서 연락을 끊는다. 그리고 어느 날 티에리는 미스터 브레인워시라는 이름을 걸고 철학도 노력도 뭣도 없이 개념미술을 시작한다. 컨셉을 작가들에게 설명하면 주문제작의 방식으로 예술은 이뤄진다.

작품 설명하는 Mr.Brainwash

대단한 예술가인 것처럼 자신을 꾸미고 행동하고, 전시회를 연다. 뱅크시에게 자신의 작품들에 대한 평을 부탁하고, 뱅크시는 비꼬는 말을 건넨다. 그리고 그 말을 이해하기나 한 건지 이 말을 광고의 전면에 배치한다.

뱅크시를 비롯한 다른 예술가들은 그가 성공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전시회는? 물론 성공한다. (놀라울 것도 없다.) 컬렉터들은 그에 대한 찬사 일색이고 어느새 그는 명실상부한 한 명의 아티스트가 된다. 다른 등장인물에 비해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의자에 앉아서 입으로 한다는 것,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단시간에 명성을 얻게 되었다는 것뿐이다.

마지막으로 뱅크시는 예술이 뭔지 모르겠다는 말로 다큐를 마친다. 뱅크시의 시도는 기존 예술에 대한 모독과 반발을 통한 자유의 추구였다. 그리고 그가 영향을 끼친 이 프랑스인 예술가는 단순히 만들어낸 허황된 이미지와 헤게모니에 따라 예술작품이 의미를 더하고 높은 가격에 거래시킨다. 이 다큐에서 볼 수 있는 그들의 역사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고 다시 그 양화가 악화를 구축하는, 역설의 대서사시다.

인정받는 아티스트 Mr.Brainwash



작가 조영남, 그가 매달려있는 동아줄


조영남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일말의 희망이라면 이런 것들이 있을 것이다. 나름의 철학, 시도, 그리고 열정과 노력. 거기에 더해서 조영남이라는 이름.

그러나 다른 작가의 작품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작품에 어떤 철학을 갖고 있을까. 철학의 여지를 발견할 수 있을까. 로스코를 제대로 독해하지도 못한 채 그저 톤에 대해서, 그 간단한 작업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는 그. 다만 가격에 대해서는 확실히 인지하고 있는 그. 

그가 진부하다고 논한 마티스나 피카소의 여러 작품도 한가지 톤으로 작업했다. 그는 진부한 마티스나 피카소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영감(톤)을 마크 로스코에게서 받았다고 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그의 철학. 실제로 존재하는지 모를 '우리 집 금송아지'같은 그의 희미한 철학. 그렇다면 역시, 그에게서 철학을 조심스레 소거해본다.

다음으로 시도, 열정, 노력은 어떤가? 누구도 감히 쉬이 욕할 수 없는 그것들은 알고 보니 어느 늙은 무명화가의 시도와 열정, 노력이었다. 10만 원이라는 가격으로 착취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과감히 소거한다.

남은 것은 조영남이라는 이름뿐이다.


문제는 예술가가 아니다. 대중도 아니다. 여기서는 예술품의 속성과 예술을 소비하는 계층의 몰이해와 욕심이 문제다.

조영남이 만들어내는 회화가 무한한 복제를 위한 팝아트가 아니라 개개의 작품을 손수 만드는 것으로 유일무이성이라는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여기서 말하는 회화는 대중의 것일 수 없다. 접근성이 제한된 소유물로서의 예술작품은 곧 '사물을 공간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자신에게 보다 더 가깝게 끌어오려고 하는' 열렬한 욕구에 의해서 의미를 갖고, 그것을 소비하는 주체는 다수의 대중이라기보다는 소수의 기득권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시피 경제력이 뒷받침되는 인물들이나 접근 가능한 미술품의 가격은 '엿장수 마음대로' 책정된다. 국내에는 공식적으로 미술작품에 대한 가치를 매기는 기관이 없다.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지표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개인 콜렉터들이 자신의 직관과 취향으로 작품에 대한 가치를 책정하는 것도 아니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 보편적으로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작품들을 수집한다.

작품이 아우라를 갖는 것이 아니라 책정된 가격이 아우라를 창출한다. 작품을 보고 있어도 별로 느끼는 것이 없다면 왜 수집하는가? 그들이 느끼는 것 하나, 그것은 사치적인 소비를 통한 우월감이다. 혹은, 꽤 자주 있는 일인데, 탈세를 위하여 작품을 수집하기도 한다. 재산으로서의 미술품이다. 

그리고 결국 이런 요소들, 개인적으로 느끼는 우월감이나 과시, 혹은 경제적인 논리가 놀랍게도 작품의 대외적인 가치를 판가름한다. 비싼 경매가에 예술계가 요동친다. 그리고 이어서 대중에게 자신들이 주장하는 예술적 가치를 강요한다. ('모르겠느냐 중생이여 무지하면 내 책을 사서 읽거라~' 누군가는 이렇게 책 장사를 할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사랑한 마크 로스코 전시회'. 마크 로스코의 이름보다 스티브 잡스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 세계. 소더비 경매가가 수식어처럼 붙는 세계. 예술의 세계는 이런식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예술이 뭔지 모르겠어요.' 비단 이것은 뱅크시만의 생각이 아니다. 대중도 이제는 알 수가 없다.


어느 미학자가 외친다



대중의 관념은 고루한가. 정말

그리고 이런 시끄러운 논란의 복판에 한 '양복신사'가 등장해 이렇게 외친다.

"핵심은 컨셉입니다. 작품의 컨셉을 누가 제공했느냐죠. 그것을 제공한 사람이 조영남이라면 별 문제 없는 것이고, 그 컨셉마저 다른 이가 제공한 것이라면 대작이지요. 하지만 미술에 대한 대중의 과념은 고루하기에, 여ㅈ론재판으로 매장하기 딱 좋은 상황."

대중의 분노로 여론재판이라는 마녀사냥이 이뤄질 것을 염려하는 말이다. 오타가 많지만 좋아요. 좋아.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대중'이며, 전제는 '대중의 관념이 고루함'이다. 마치 버스 안의 양복신사가 자신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상대적으로 어린 두 여성에 대한 어른으로서의 지당한 가르침을 행하기 위해서 그녀들에게 명령하는 것을 합당하게 여긴 것처럼, 그는 대중이 무지하다는 것을 전제로 미학자로서의 가르침을 발사하는 것이다. 조용히 좀 하세요! 미학도 모르는 것들이….

놀랍지 않다. 프로 어그로꾼이라 불리는 그의 화법은 항상 그런 식이다. 다소 과격한 어휘의 사용으로 한창 예민한 이들의 성질을 돋운다. 물론, 이론의 여지가 없는 논지를 설정함으로써 결국 스스로가 승자가 되고 거기에 반응한 이들은 모두 패자로 만든다. 무지한 대중으로 싸잡는다. 악당 녀석들은 다 죽어버려야 해. 애니메이션 수퍼배드의 서러움이, 브레이킹배드의DEA형사가 저지르는 폭력이 떠오른다.

옳은 말은 정의일지 모르지만, 어떤 옳은 말은 폭력이 되기도 한다. 정의와 폭력은 정도의 문제다. (정의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제국의 폭력이라든지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시간 나면 하겠다) 과연 그의 화법이 단순히 가르쳐주기, 미학자로서 예술을 보호하고 옹호하고 미적 가치를 수호하며 대중에게 전달하는 그런 선한 목적만을 위한 것인지, 혹은 개인적인 분노 표출에도 그 무게가 실리지 않는지 좀 더 생각해보게 된다.

 버스의 그 남자는 '거 조용히 좀 합시다!' 이후에 '그 말'을 덧붙일 필요가 있었을까? 대작이라는 개념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나서 '대중'의 '고루함'이라는 일반화 발언을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 대중들에게 불편한 침묵을 유도할 필요가 있을까?

여자들은 이래. 남자들은 이래. 부산사람은 그래. 대중들은 이래. 그 동네 미학과 출신들은 다 뭐 같애. 요즘 젊은것들은 그래. 일반화는 기본적으로 오만함에서 비롯한다. 내가 이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는 오만함. 흔히들 꼰대라고 불리는 계층이 아주 쉽게 해버리는 단정들. 

이성에 대한 맹신이 세계사적으로 어떤 결과를 야기했는지, 파시즘과 세계대전의 역사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여기 적지 않겠다. 그러나 그 사건들은 근대의 사건들이었다는 사실을, 근대 적에 이미 겪고 지났어야 할 과오였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꼰대의 어원이 근대는 아닐까 하는 상상을 여기 남긴다.아, 또 덧붙여서 저 미학자도 근대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하는 염려도 여기 남긴다. 

그러나 나는 그 미학자를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입시시절 비문학 지문에서 만난 그, 지루한 야자시간에는 정재승과 떠들어주었던 그. 글자가 고팠던 군시절 개인정비시간을 '미학에세이'로 즐겁게 해준 그와는 오히려 친근한 느낌이다. 다만 로마 제국의 장군 옆에 딱 붙어서서 "전투에서 이겼다한들 그대는 신이 아니며 한 인간에 지나지 않으십니다."라고 귓가에 속삭이던 한명의 성가신 노예처럼 프로어그로꾼의 귓가에 "당신이 싸워야 할 것은 대중이 아닙니다. 태생적 싸움꾼이여ㅇㅗㅇ(안경올리는 손가락 이모티콘)"라고 속삭이는 한명의 프로불편러가 되고 싶다.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제 예술이 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는 대중들을 이끌어 주는 것이 당신이 해야할 일이다. 싸워야 할 대상은 따로 있다. 미학자가, 비평가가, 예술가와 작가들이 발붙이고 사는 예술계를 좀 먹는 사람들과 싸워라. 경제논리에 지배당해 솟구치는 미술품의 가격들, 그런 시스템을 관행으로 쉽게 치부하지 말라. 회사와 국가에 충성하라는 꼰대들처럼, 어떤 맹신적인 우익집단처럼 암덩어리가 되어 자신의 숙주를 죽이지 말라. 시스템을 유지하는데 급급해 하지말라. 대한민국의 예술 갑남을녀들이 코피터트려가며 야작하고 있는 이 때, 그들을 상심하게 하지 말라. 선취해야 할 것은 실력이 아니라 나가서 화개장터를 부르고 유명해지는 일이라고, 이후에 똥을 싸든 뭘하든 마음대로 하라고 쉽게 말하지 말라.


대중의 무지만을 욕하며 책을 파느라 어느 편에 서야하는지 잊지 말라. 당신은 대중들에게는 이제 나름 이름을 쌓은 공인이며, 미학자이고 나름대로 예술의 자경단이 되어야 한다. '왓치맨'을 '왓치'하는 것은 '관념이 고루하다'는 대중 속에서 나와 같은 프로불편러들이 비집고 나타나 친히 수행해 줄 것이다.


예술을, 그리고 거기에 업혀 사는 당신을 살리는 길은 당신이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신은 불평가가 아니라 비평가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곧 올라올 당신의 글을 기대하겠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