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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을 통해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노동이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노동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 쓰는 말이다, 노동을 통해 단순히 돈을 버는 것을 넘어 자아를 성취하고 인격을 도야하네 어쩌네 하는, 도덕 교과서 같은 이야기와 함께 쓰이곤 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노동을 통해 자유를 얻고 자아를 성취하고 또 인격을 도야하고 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나는 약 1년 조금 넘게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데 시간당 6,500원, 한 달에 대개 30만 원 조금 넘는 돈을 벌고 있다. 약 1~2주에 하나씩 글을 써 원고료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내 주 수입원은 아르바이트를 통해 버는 돈이다. 그래도 2016년 최저임금인 6,030원보다는 ‘무려’ 470원이나 많이 버는 셈이지만, 그리고 이래저래 용돈도 받는다지만 그 돈으로 내 삶을 영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까지는 아니더라도 극기에 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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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하지만 잔인한 이야기

이건 유감스럽게도 너무나 뻔한 이야기이다. 최저임은 낮다.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은 굶어 죽어간다. 그런 이야기들뿐이다. 더 유감스러운 사실은 뻔한 이야기 밖의 세상은 그보다 더 잔인하리만치 뻔하다는 것이다. 차비가 없어서 걸어 다니고, 밥값이 없어서 편의점 햄버거 하나로 끼니를 해결하는 사례들이 잔인하리만치, 그리고 지겨우리만치 많다는 것이다.

역시 뻔한 이야기지만, 이 문제는 비단 아르바이트 노동자들만이 문제는 아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지만, 또 보(이)지 않는 ‘유령’들, 즉 노동자 전반의 문제일 것이다. ‘계급’이라는 고리타분한 말을 쓰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냥 비정규직 수준이 아니라 사실상 ‘소모품’ 취급을 받는 청소, 경비 노동자들도 그렇고 택배 노동자들도 그렇다.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그렇고 정규직 노동자 또한 그렇다. 이른바 블루칼라 노동자들도 그렇고 화이트칼라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사람을 예속하는 노동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라는 말이 무색하다 못해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작금의 시대에선 노동은 오히려 사람을 예속하기만 할 뿐이다. 노동하면 할수록 살 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살기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빚이 많다면 더욱 살기 힘들어지는데,  문제는 빚이 없는 경우를 찾는 것은 백사장에서 진주를 찾는 격이다. 야구에 비유하자면 일단 2스트라이크를 안은 상태로 타석에 들어서는 셈인 것이다.

흔히 ‘노동귀족’이라 불리는 이들도 사실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은데, 그들도 집 대출금이나 차 할부금 따위를 갚고 나면 손에 쥐는 것은 생각보다 별로 많지 않다고 한다. 그 빚 중 꽤 많은 부분은 결국 노동자에게 ‘직원 할인’ 따위를 내걸어 대출을 끼고서 라도 구매하게 하는 회사 때문에 지게 된다는 코미디 같은 일도 일어나고 말이다.

그들도 그 돈을 손에 쥐고, 빚을 갚고,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하루 8시간짜리 기본 노동 외에도 수당을 위해 잔업, 특근, 야근 등 초과 노동을 해야 한다. 임금 중에서 기본급의 비중이 말도 안 되게 적고 그 부분들을 이런저런 성과급과 수당이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왜 한국의 노동시간이 OECD 평균을 너무나 가볍게 뛰어넘는지 알 수 있는데, 사실 이런 현상은 다른 직종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곤 한다. 돈을 벌어 목구멍에 풀칠이나마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야기 한 것처럼 한국의 임금은 말도 안 되게 낮고 노동시간은 말도 안 되게 길다. 밤에 어느 곳을 가도 불 켜진 편의점과 프랜차이즈 카페, 음식점과 술집들이 있고 그 모든 곳에는 공통으로 WHO가 인정한 2급 발암물질에 노출된 이들이 존재한다.

심야노동 말이다. 그들은 다 각자의 이유로 그 발암물질의 한가운데에 있을 것이다. 결국, 그 이유가 수렴되는 것은 결국 ‘생존’ 일 텐데, 이는 노동이 자유가 아니라 생존을 담보로 사람을 예속하는 인질범이 되어버린 현실을 보여준다.

교과서처럼 자아를 실현하네 어쩌네 하는 말들은 이미 그 빛을 잃은 지 오래고, 살면서 지게 되는 빚들 때문에라도 사람은 거기에 예속된다는 것이다.


살아 나가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타자들


말했듯이 작금의 노동은 오히려 사람을 거기에 예속시켜 버리기 일쑤다. 열심히 ‘노오력’ 하면 다 된다는 말은 정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3루에서 태어났지만, 자기가 3루타를 쳤다고 생각하며 인생을 살아간다.

배리 스위저의 말처럼, 그 ‘노오력’ 이라는 말은 3루에서 태어났거나 별 무리 없이 3루에 들어갔으면서 타석에 서 있는 이들에게 왜 3루타를 치지 못하냐는 말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3루에서 27m 넘어 타석에 있는 이들은 배트도 아닌 각목, 심지어 나뭇가지 따위를 들고 2스트라이크 상황에서 출루하는 것에 목숨을 걸고 있는데 말이다. 타석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죽으나 사나 그 안에서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타자의 입장, 그것이 바로 노동에 예속된 채 자유 비슷한 것, 자아실현 비슷한 것도 이루지 못하는 모습들일 것이다.


그 타자가 각목이나 나뭇가지로 안타를 치건 볼넷을 거르건, 야수 실책이나 하다못해 몸에 맞는 공으로 1루까지 어찌어찌 나간다고 쳐도 1루에서 홈플레이트는 너무 멀고, 오히려 아웃 되어 돌아갈 더그아웃은 너무나 가까이 있다. 이른바 제도권 노동에 포함된다고 해도 목표를 이루는 것보다 실패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혹은 경기에서 빠질) 확률이 더욱 높다는 것이다.

후속 타자가 적시타, 하다못해 진루타라도 쳐 줄 확률은 매우 낮다. 도루와 홈스틸을 이용해 홈인할 확률은 더욱 낮다. 유감스럽게도 현실이라는 마운드 위에 올라가 있는 투수는 못 해도 전성기의 랜디 존슨급 되는 선수이고 타석에 서 있는 타자, 그러니까 우리는 더블A 리거 급만 되어도 잘 난 축에 들기 때문이다. (사실 그 이상급의 배경을 가진 타자는 한 2루쯤에서 시작할 것이다)

우리 뒤에 있는 (아마 우리와 같은 급일 것이 분명한) 타자는 적시타나 진루타를 쳐 줄 확률은 똑같이 낮고, 아마 대부분 확률로 얼어붙어 삼진을 당하거나 병살타를 칠 것이다. 즉, 혼자 성공한다고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야구가 팀 스포츠인 것처럼 이 사실상 예속의 공간에서도 혼자 성공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함께하지 않으면 결국 한 점도 내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더그아웃으로 돌아갈 것이 너무나 뻔하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에 쓰여 있던 말

노동자의 연대 따위의 이야기는 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여기에 개인의 불행이란 말을 붙이는 것은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즉 한 시간에 육천오백 원을 받으며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는 나나, 투명인간이나 소모품 취급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나, ‘노동귀족’이라 불리는 이들이나, 넥타이를 맨 이들이나 결국 똑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아마 망하는 순서가 조금 다른 정도일 것이다.

지금 우리는 외줄 위에 올라서 있고, 그 줄의 이름은 노동이다. 신자유주의는 그나마 있던 얇은 그물망마저 걷어치워 버렸다. 아마 우리는 평생 이 외줄에 예속된 채 벗어나지 못할 공산이 크고, 그렇지 않다면 노동에서 탈락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건대, 노동은 오히려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작금의 노동은 우리가 불우함 속에서 외줄을 타다 보면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유치한 희망 따위나 주며 예속시킬 뿐이다. 아마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라는 말을 정말 진지하게 쓰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면, 3루에서 게임을 시작해 타석에 선 기분을 모르는 사람이거나, 저 말의 독일어 번역인 “Arbeit Macht Frei.” 라는 말을 믿는, (네오) 파시스트일 것이다. 저 말은 아우슈비츠에 쓰여 있던 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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