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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모두 놀라 어쩔 줄 몰라서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 하면서 서로 말하였다. 그런데 더러는 조롱하면서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도행전 2장 12 – 13절




언제부터인가 5월은 내게 슬픈 계절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봄이 그런 계절이겠다. 봄을 슬픈 계절로 인식하게 된 계기는 518에 대해 접하게 된 것이었다. 지금도 그럴 때가 있지만, 특히 광주에 다녀온 뒤 오히려 518에 대해 말하기 어려웠던 경험이 있었다. 이 경험이 나만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매년 5월이 되면 ‘오월의 사회과학’을 읽는데 이 책의 1부 1장의 제목은 ‘침묵의 역사’이다. 아무튼, 거대한 사건 앞에서 할 말을 잃어버리는 일은 우리 주변에서 드문 일이 아니다. 침묵은 거대한 사건 앞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 중 하나이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첫 증언이 나온 것이 1991년 8월이었다. 거의 반세기가 지나서야 침묵을 풀 수 있었던 사람들의 한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 아니다. 미국군 위안부 김정자(가명)의 증언 역시 이러한 침묵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근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애, 내가. 이 아픈 거를 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될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애, 내 생각에. 왜냐하면 지금 이러고 인제 다 끝났다, 이러지만은, 어딘가 모르게 응어리가 있는게 있어, 또, 나도. 다 잊어버리고 살라 그랬는데 …”[각주:1] 


아마 성서에 나오는 초대교회 공동체, 예수의 제자공동체 역시 그런 시간을 겪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 예수의 제자들 역시 이러한 이유로 침묵을 겪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민중봉기가 빈번한 지역에서 자신들이 따르던 스승이 사법살인[각주:2] 당하는 모습을 보며 슬픔과 분노를 느끼던 가운데, 전향자들과 자책하는 이들 가운데 예수공동체의 집단 침묵증세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각주:3]


예수의 제자공동체가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예수의 죽음 뒤도 아니고, 예수의 부활 뒤도 아니었다. 성령강림이라고 하는 사건 뒤에야 비로소 그들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 (물론 성령강림 전 베드로가 120명 앞에서 이야기한 사건이 있지만, 그들은 외부인이 아닌 신도들이었다.) 침묵의 시간은 성령강림이라는 사건을 계기로 운동의 시간으로 전환된다. 


먼저 성령강림에 대한 짧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성령강림은 예수의 제자들이 한곳에 모여있었을 때 불꽃이 혀처럼 생긴 불이 그들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고 그들이 알 리가 없는 외국어를 사용하며 예수의 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다. 이 사건에서 나오는 외국어를 사용하며 예수의 운동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비기독교인도 잘 아는 방언의 첫 등장이다. (고린도전서의 방언과 사도행전의 방언이 다르다는 그런 얘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자.) 

제자들이 방언하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외국어를 쓰는 교포(디아스포라)들이 몰려오고 외국어를 사용하지 않는 유대인들도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언어로 예수의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고 한다. 하지만 또 한무리의 사람들은 그들을 조롱하면서 저들이 술에 취했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의 모습이 꽤나 불경해 보였다는 추측은 너무한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 제자들의 전도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 삼천 명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 숫자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이 계기를 통해서 예수 운동이 변방의 작은 운동에서 더욱 큰 범위의 운동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본문에 나오는 방언과는 상관없어보이는 영상...


여기서 내가 관심 갖는 지점은 더러는 조롱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이다. 모두가 박수치는 소리가 아닌, 낯설고 불경하기에 조롱당하는 목소리가 필요하다. 오늘날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우리는 어떤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는가? 

앞서 내가 언급한 봄을 슬프게 하는 사건들은 대체로 두 개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한가지는 권력과 정부의 은폐하고 낙인찍는 언어이고 또 한가지는 피해자, 희생자는 사라지고 운동하는 이들만 남은 당사자성 없는 경전적 언어이다. 이 언어들은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범위를 스스로 축소시키고 사건의 진상을 가린 채 위대한 국가, 혹은 위대한 투사(희생자)만을 만들 뿐이다. 

이 가운데 우리는 새로운 이야기를 해야 한다. 예수와 살을 맞댄 기억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이 새 언어를 가지고 운동을 새로이 시작했듯 우리에게도 진짜 기억이 있는 새로운 이야기가 터져 나올 그 사건이 필요하다. 그 이야기는 그냥 터져나오는것이 아니라 그들의 한이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될 때, 사건의 진상이 밝혀져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1. 김정자 증언,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 김현선 엮음(파주: 한울, 2013). 310. [본문으로]
  2. 신앙고백과 무관하게 예수는 정치범이라는 이유로 로마와 성전세력의 야합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며 죄목으로 십자가에 같이 달린 IESVS·NAZARENVS·REX·IVDÆORVM(예수, 나자렛사람, 유대인의 왕)이라는 문구는 이것을 증명한다. [본문으로]
  3.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경우 자신의 일본에서의 생활과 폭격당한 경험을 기억하지 못하고 기억을 해낸다 해도 일본어로만 표현되는데 이러한 그들이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은 일본인의 억압과 과중한 노역, 일본 군인의 성욕분출구가 되었다는 부끄러움과 돌아온 조국의 냉대와 같은 기억들이었다. 김용복,『한국민중의 사회전기』 (서울: 한길사, 1987). 7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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